페이스북 탐방중에 제가 자주 눈팅하는 철학 그룹에서 한 글을 보게 되었습니다..

 

-----------------------------------------------------------------------------

 

 

제가 번역한 논문입니다. 여기에 공유합니다. 만약 문제가 된다면 지우겠습니다.

도덕의 유신론적 메타윤리학적 근거의 필요성 - William Lane Craig

[유신론과 자연주의는 도덕적 삶의 충분한 근거를 제공하는데 있어서 대척점에 서있다. 유신론적 세계관은 객관적인 도덕적 가치, 도덕적 의무, 그리고 도덕적 책임을 위한 충분한 근거를 제공할수 있다. 하지만 자연주의는 이 세가지에서 모두 실패한다. 도덕적인 가치와 의무의 존재에 대한 믿음은 신의 존재에 대한 믿음의 충분한 근거가 될 수 있다. 더 나아가 도덕적 책임을 근거로 신을 믿는 믿음을 위한 실용적인 논증을 할 수 있다.

 

자연주의: 자연적인 실체만이 존재하고 초자연적 실체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철학적 사조

 

신 없이 우리는 선할 수 있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너무 당연해 보이기에 분노를 일으킬 정도입니다. 기독교 유신론자들은 물론 신 안에서 도덕적인 삶을 살기 위한 힘을 얻고 신 없이 사는 삶보다 나은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지만, 신에 대한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 도덕적인 삶을 살지 못한다고 하는 것은 교만해보이고 무지해 보이기도 합니다. 실제로도 무신론자들의 삶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기도 합니다.

 

잠시만 멈추고 생각해봅시다. 사람이 신에 대한 믿음없이 선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진정으로 교만하고 무지한 주장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이 질문이 아니었습니다. 질문은 “우리가 신 없이 선할 수 있는가?” 였습니다. 이 질문을 할 때, 우리는 도덕적 가치의 객관성에 대한 메타윤리학적 질문을 도발적인 방식으로 하고 있는 것 입니다.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가치들이 도로에서의 통행방향과도 같은 사회적인 발명품에 불과한 한 것이거나 아니면 특정 음식에 대한 선호와도 같이 주관적인 선호도에 불과할까요? 아니면 이 가치들은 인간의 인식으로부터 독립적으로 타당할까요? 그렇다면 그것의 근거는 무엇일까요? 더 나아가 도덕이 인간의 발명품에 불과하다면 왜 우리는 도덕적으로 행동해야 할까요? 도덕이 개인의 이익추구와 충돌한다면 어떨까요? 우리에게 도덕적 선택과 행동에 대한 책임이 있는 것 일까요?

 

오늘 저는 신이 존재한다면 객관적 도덕적 가치, 도덕적 의무와 도덕적 책임의 존재가 보장되며, 또한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도덕은 단순히 인간의 발명품에 불과하다는, 다른 말로 하자면 신이 없다면 도덕은 온전히 주관적이고 도덕에는 의무적인 요소가 없다는 것을 논증하려 합니다. 신이 없다 할 지라도 완전하게 동일한 행동을 할 수 있지만, 그런 경우에 이러한 행동은 선하거나 악하다고 할 수 없는데, 그 이유는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객관적인 도덕적 가치 또한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신 없이 진정한 의미에서 선할 수 없습니다. 반면에, 만약 우리가 도덕적 가치와 의무가 객관적이라 믿는다면, 그것은 신에 대한 믿음에 도덕적인 근거를 제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이 존재한다는 가정을 받아들여 봅시다. 우선, 신이 존재한다면 객관적인 도덕적 가치는 존재합니다. 객관적인 도덕적 가치가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은 누군가가 어떻게 믿는가와는 별개로 어떤 것이 옳거나 그르다고 말하는 것 입니다. 예를들자면, 홀로코스트를 자행한 나치 스스로는 그것이 선하다고 믿었던것과는 별개로 나치의 반유대주의는 도덕적으로 옳지 않은 것 이었습니다. 나치가 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하였고 그들을 반대하는 모든 사람들을 죽였거나 세뇌하였다 할 지라도 나치의 반유대주의는 틀렸다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유신론적인 입장안에서는, 객관적인 도덕적 가치는 신 안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신의 거룩하고 완전히 선한 본성이 모든 행위와 결정들을 판단할 절대적인 기준을 제공합니다. 신의 도덕적 본성은 플라톤이 “선” 이라 말했던 것 입니다. 그는 도덕적 가치의 중심이자 근원입니다. 그는 스스로의 본성에 의하여 사랑이 넘치고, 자비롭고, 의롭고, 신실하며, 친절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신의 도덕적 본성은 우리와의 관계 가운데에서 표현되는데, 그 방식은 신의 ‘명령’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때, 신의 명령이 우리의 도덕적 의무를 구성하게 됩니다. 이 명령들은 임의적인 것이 아니라 신의 도덕적 본성으로 부터 필연적으로 나오게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유대-기독교적 전통안에서의 인간의 도덕적 의무는 두가지 명령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첫째,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 입니다. 둘째는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입니다. 이 기반위에 우리는 사랑, 자비로움, 희생, 평등 등을 객관적인 선함과 옳음 위에서 긍정할 수 있고 이기심, 증오, 학대, 차별, 핍박 등을 객관적인 악이라 비판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유신론적 가정 안에서 신은 모든 사람에게 자신의 행위에 대한 책임을 지울 수 있습니다. 악과 불의는 심판받을 것 입니다. 정의는 수호될 것입니다. 선은 결국에는 악을 이길것 입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우리는 도덕적 우주 안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 삶에서의 불평등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으로는 신의 정의의 저울은 균형을 찾을 것 입니다. 따라서 현재의 삶에서 우리가 만드는 도덕적 선택들은 영원에 이르는 중요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만약 우리의 행위들이 허무하고 궁극적으로 의미없는 것들이 아니라고 믿는다면, 우리는 우리의 이기심과 부딫히는 도덕적 선택들을 지속적으로 할 수 있고 극단적인 희생 또한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도덕적 삶은 허무하지 않고 매우 중요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나는 유신론이 도덕에 단단한 기반을 제공하는 것이 명백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이 가정을 무신론적 가정과 대비시켜 봅시다. 첫번째로, 무신론이 만약 참이라면 객관적인 도덕적 가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도덕적 가치의 기반은 무엇이 될 수 있을까요?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인간존재의 가치에 어떤 근거가 있을 수 있을까요?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인간존재가 특별하다거나 그들의 도덕이 객관적으로 참되다고 생각할 이유를 찾기 힘들어집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가 무엇을 해야만 한다는 도덕적 의무가 있다고 생각할 이유자체가 사라집니다. 누가, 혹은 무엇이 우리에게 도덕적 의무를 부여합니까? University of Guelph의 과학철학자인 마이클 루즈 Michael Ruse는 이렇게 말합니다.

 

현재 진화론자의 입장에서는 인간의 도덕적인 의식이 존재하는 것은 그러한 의식에 생물학적 가치가 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도덕은 손, 발이나 이빨이 생물학적 적응인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이성적으로 정당화 가능한 객관적인 무엇에 대한 주장이라 여겨지는 도덕은 환상일 뿐입니다. 나는 누군가가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라고 말하는 것을 높게 평가하지만 그러한 주장이 어떤 근거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할수 없습니다. 도덕은 생존과 번식을 위한 도구일 뿐입니다. 도덕에 더 깊은 의미가 있다는 주장은 환상입니다.

 

사회적-생물학적 압력에 의해 호모사피엔스에게 일종의 “무리의 도덕”과 같은 것이 진화하였는데, 이 도덕은 생존을 위한 경쟁에서 종의 유지를 위해 기능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입장안에서 호모사피엔스의 도덕이 객관적으로 참되다는 것을 보장할만한 것은 없습니다.

더 나아가서, 무신론적인 입장안에서는 신적인 입법자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도덕적 의무의 근원이 될 수 있을까요? 유명 윤리학자인 리차드 테일러Richard Taylor는 이렇게 주장합니다.

신적인 입법자를 거부하는 현대는 도덕적인 옳고 그름이라는 관념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해왔지만, 신을 거부하는 순간 도덕적 옳고 그름이 유의미해지는 조건들을 제거했다는 사실을 망각했습니다.

따라서, 교육받은 사람들 조차 전쟁, 낙태, 또는 인권의 침해따위의 것이 ‘도덕적으로 그르다’ 라고 주장할때 그들이 참되고 의미있는 것을 말했다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러한 질문들이 종교 밖에서 단 한번도 답변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현 시대의 윤리학 저술가들은 종교를 언급하지 않고 도덕적 옳고 그름과 도덕적 의무에 대한 담론을 만들어냅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저 지적인 체계들을 허공에서 만들어내고 있을 뿐입니다. 사실, 그들의 담론은 무의미한것입니다.

우리앞에 높여진 이 주제에 대한 명확한 이해를 가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질문은 “우리가 도덕적 삶을 살기 위해 신을 믿어야만 하는가?” 가 아닙니다. 무신론자와 유신론자 모두 우리가 선하고 좋은 삶이라 말하는 삶을 살지 못할 수 있다는 것은 자명합니다. 비슷한 선상에서 “신에 대한 언급없이 도덕적 체계를 만들어 낼 수 있는가?” 또한 바른 질문이 아닙니다. 만약 무신론자가 인간이 객관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주장을 할 수 있다면 그의 주장은 유신론자가 많은 부분 동의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신에 대한 언급없이 객관적 가치의 존재를 인지할 수 있는가?” 또한 바른 질문이 아닙니다. 신자는 보통 신을 믿어야만 객관적 도덕적 가치, 예를들어 아이들을 사랑해야 한다는, 를 발견할 수 있다는 주장을 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인본주의적 철학자 폴 커츠 Paul Kurtz는 이렇게 주장합니다. “도덕적 규범들에 대한 질문들은 존재론적 기반에 대한 질문들입니다. 만약 규범들이 신으로 부터 오거나 다른 초월적 근거에 기반을 두지 않는다면 그것들은 완전히 일시적인것들인가?”

 

만약 신이 없다면 호모사피엔스의 “무리의 도덕”의 객관성을 위한 근거는 사라지게 됩니다. 인간이 특별할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들은 단지 우연적으로 발생된 자연물일 뿐이고, 우주안에서 상대적으로 최근 진화된, 그리고 곧 있으면 사라질 우주의 먼지일 뿐입니다. 어떤 행위들, 예를들어 근친상간과 같은, 은 생물학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이익이 없기 때문에 인간의 진화의 과정가운데 터부가 되었을 지 모릅니다. 하지만 무신론적 입장 안에서는 근친상간은 ‘실제로’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커츠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행동을 지배하는 도덕적 규범들은 습관이나 관습, 감정 아니면 유행에 속합니다. 그렇다면 이 “무리의 도덕”을 거부하는 사람은 단순히 유행을 벗어나는 것에 불과합니다.”

자연주의적 세계관 안에서의 인간존재의 객관적인 가치의 부재는 이 세계관의 두가지 가정에 근거합니다. 유물론과 결정론 입니다. 자연주의자는 보통 유물론자이거나 물리주의자인데, 그들은 인간을 단순히 동물적 존재로 봅니다. 하지만 인간에게 비물질적인 면이 없다면, (이것을 영혼이라 부르던지 정신이라 부르던지요) 인간의 도덕에 객관성이 있다고 여기는 것은 인간중심주의일 뿐입니다. 유물론적인 인류학에서는 인간이 쥐와 다르게 객관적으로 가치있다 여길 이유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또한, 뇌로부터 분리된 정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생각하고 행위하는 모든 것은 오감으로 부터 입력되는 데이터와 유전자에 의하여 결정될 뿐입니다. 어떤 행위를 자유롭게 결정하는 개인적 주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 입니다. 하지만 자유가 없다면 우리의 선택은 도덕적인 의미를 가질 수 없습니다. 인간의 선택은 감각적 자료와 물리적인 구성의 줄에 의해 조종되는 인형의 팔들의 움직임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인형의 움직임에 어떤 도덕적 가치가 있겠습니까?

 

따라서 자연주의가 사실이라면, 전쟁, 핍박, 혹은 범죄를 악하다고 비판할 근거가 사라집니다. 동시에 형제애, 평등, 사랑 등을 선하다고 칭송할 근거 또한 사라질 것입니다. 당신이 어느 가치를 선택하던지 옳고 그름은 없습니다. 선악은 존재하지 않죠. 이것은 홀로코스트와 같은 재앙이 도덕적으로 아무 의미가 없다는 뜻입니다. 당신은 그것이 잘못되었다 생각할 지 모르지만 당신의 의견은 나치의 전쟁범죄자가 홀로코스트를 옹호하는 것에 대하여 아무런 정당성이 없습니다. 피터하스Peter Haas는 그의 책 Morality after Auschwitz에서 어떻게 국가에 의해 지지된 대대적 인종말살정책을 사회가 의식적으로 참여 할수 있었는지에 대해 질문합니다. 그는 이렇게 주장합니다.

나치의 범죄자들은 도덕에 대한 혐오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유대인과 집시들에 대한 인종말살을 정당화하는 도덕에 맞추어 행동했습니다. 홀로코스트가 지속적으로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유대인의 체포와 추방을 잘못되었다고 말하지 않는 것을 넘어 그것이 받아들여질만 할 뿐 아니라 선한것이라고 주장하는 새로운 도덕이 이전의 도덕의 자리를 차지했기 때문입니다.

 

하스가 더 나아가 지적하는 것은 나치의 도덕은 정합적이고 내적인 일관성이 있었기 때문에 나치의 도덕은 내부로 부터 비판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오직 상대주의적이고 사회-문화적인 규범을 넘어서는 초월적인 시점을 가정한 후에야만 이러한 도덕에 대한 비판이 가능해집니다. 하지만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러한 초월적 시점을 가질 수 없습니다. 아우슈비츠에 감금되었던 한 랍비는 당시 십계명 (살인하지 말라, 거짓말 하지 말라, 훔치지 말라 따위의) 이 완전히 뒤집어 진것 같았다는 진술을 합니다. 인간은 그와같은 지옥을 맛본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만약 자연주의가 참되다면 우리의 세계가 바로 아우슈비츠입니다. 선과 악은 없고, 옳고 그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객관적인 도덕적 가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 만약 무신론이 참되다면 개인의 행위에 대한 책임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객관적인 도덕적 가치와 의무가 자연주의내에서 존재한다 할 지라도 그것들에 도덕적 책임이 없기 때문에 그것들은 전혀 의미가 없게 됩니다. 만약 삶이 무덤에서 끝난다면 스탈린과 같은 삶이나 성인의 삶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러시아의 문호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는 다음과 같이 지적했습니다. “삶이 유한하다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

소련감옥의 고문가들은 이와같은 사실을 매우 잘 알고 있었습니다. 리처드 범브란트 Richard Wurmbrand는 이렇게 증언합니다.

무신론의 잔인성은 선에 대한 보상이나 악에 대한 심판에 대한 믿음이 없을 때 나타납니다. (무신론 안에서) 인간이 될 필요는 없습니다. 인간 안에 있는 깊은 악을 제어할 필요 또한 없습니다. 공산주의 고문가들은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신은 없고, 사후세계도 없고 악에 대한 심판도 없다. 우리는 우리가 하고싶은것을 할 수 있다.” 전 한 고문가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듣기도 했습니다. “나는 존재하지 않는 신에게 감사한다. 내가 이시간 내 마음안에 있는 모든 악을 이렇게 발산해도 살아있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러한 말들을 잔인한 고문을 감옥에 수감된 사람들에게 자행하는 도중에 했습니다.

 

죽음이 전부라면 우리가 어떻게 사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정의롭게 사는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고 쾌락을 따라 사는것 만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사람에게 당신은 어떤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캘거리대학의 무신론적 윤리학자 카이 니엘센Kai Nielsen이 이러한 어두운 세계를 보여줍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합니다.

이성이 도덕을 요구한다거나 모든 이성적 인간이 이기주의자나 고전주의적 반-도덕주의자가 되어선 안된다는 것에 대한 근거를 우리는 찾을 수 없다. 이성은 아무것도 결정하지 않는다. 내가 당신에게 제시하는 그럼은 그리 보기 좋은 것은 아니다. 사실 그것은 나를 우울하게 만든다...순수하게 실천적인 이성은, 만약 그것이 모든 사실들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당신을 도덕으로 이끌수 없다.

 

누군가는 도덕적 삶을 사는 것이 바로 우리의 이익에 가장 부합하는 것이라 주장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하게도 그것은 항상 참인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이익과 도덕이 상충하는 상황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더나아가 만약 누군가가 페르디난드 마르코스나 파파 독 뒤발리에 혹은 도날드 트럼프 같이 충분한 힘을 가지고 있다면 양심의 명령을 거부하고 자신만을 위한 삶을 안전하게 살수 있습니다. 역사학자 스투어트 C. 이스턴 Stewart C. Easton은 이렇게 요약합니다. “도덕이 인간의 사회적 삶에 이익이 되거나 기분을 좋게 만들어 주지 못한다면 인간이 도덕적이어야 하는 객관적 이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쾌락을 넘어 인간이 무엇을 해야만 하는 당위에 대한 객관적 이유는 없다”

희생적 행위는 자연주의적 세계안에서는 전혀 가치없는 행위입니다. 왜 당신이 당신의 이익과 당신의 삶을 타인을 위해 희생해야 합니까? 자연주의적 세계에서는 자기를 부인하는 행위를 선택할 좋은 이유가 없습니다. 사회적-생물학적 시점에서는 그러한 이타적 행위는 단순히 진화에 의하여 결정된, 종의 지속을 돕는 것일 뿐이죠. 자신의 자녀를 구하기 위해 타는 집으로 뛰어가는 어머니나 자신의 동료들을 구하기 위해 수류탄에 뛰어드는 군인은 개미집을 구하기 위해 싸우는 개미와 비교하여 도덕적으로 가치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상식은 우리에게 그러한 사회적-생물학적 압력을 벗어나는 자기파괴적 행위를 선택하지 말고 자신의 이익에 부합하는 행위를 하라고 말합니다. 종교철학자 존 힉 John Hick 은 하나의 사고실험을 제안합니다. 그는 개미 한마리가 사회-생물학적 지식을 가졌고 개인적인 선택을 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진 상황을 제시합니다.

개미집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길 요청된 한마리의 개미가 있다고 상상해보세요. 그는 자기파괴를 향해 자신을 이끄는 거대한 본능의 힘을 느낍니다. 하지만 그는 왜 이러한 본능적 자살프로그램을 왜 수행해야하는지 질문합니다. 왜 그는 수많은 다른 개미들이 자신의 존재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야만 할까요? 그가 가질수 있는 것은 오직 그의 현재의 삶이므로 그가 본능의 무의식적 힘에 대해 자유롭다면 그는 그의 삶을 위한 선택을 할 것입니다.

 

왜 우리는 다르게 행동해야 할까요? 삶은 자신의 이익 바깥의 행위을 하기엔 너무 짧습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하는 것은 그저 멍청할 뿐입니다. 따라서 자연주의 철학으로 부터 나온 도덕적 책임의 부재는 긍휼과 희생의 도덕을 공허한 추상으로 만듭니다. 토론토대학의 철학자, R. Z 프리드먼 Friedman 은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립니다. “종교없이는 긍휼에 대한 도덕의 정합성은 성립될 수 없습니다. 타인에 대한 존중의 원리와 적자생존의 원리는 비양립적입니다”

우리는 따라서 신의 존재에 대한 견해로부터 나오는 도덕에 대한 관점들이 얼마나 극단적으로 다를 수 있는지에 대한 결론을 확인했습니다. 신이 존재한다면 도덕은 단단한 근거를 가질 수 있습니다. 신이 없다면, 니체가 보았듯이, 우리는 허무주의에 봉착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 두가지 선택은 임의적으로 결정될 필요가 없습니다. 반대로, 우리가 논의했던 바로 그 생각들이 신의 존재를 도덕적으로 정당화하는데 사용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객관적인 도덕적 가치가 존재한다 생각한다면, 우리는 논리적으로 신이 존재한다는 결론에 이를 수 있을 것 입니다. 객관적인 도덕적 가치가 존재한다는 것보다 더 자명한 것이 있을까요? 물리적 세계의 객관적인 실재성을 부정할 이유가 없듯이 객관적인 도덕적 가치의 실재성을 부정할 이유 또한 없습니다. 루즈의 논리는 나쁘게 본다면 발생론적 오류의 예가 될 뿐이고, 좋게 본다 할 지라도 객관적인 도덕적 가치에 대한 주관적인 인식이 진화했다는 것을 증명할 뿐입니다. 하지만 만약 도덕적 가치들이 점차적으로 발견되는것이고, 발명되는 것이 아니라면, 점차적이고 반증가능한 도덕적 영역의 발견은 그러한 영역의 객관적인 실체성을 부정하지 못합니다. 물리적 세계에 대한 반증가능한 인식이 물리적 세계의 실재성을 부정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객관적 가치를 발견한다는 것은 사실이고 우리 모두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강간, 고문, 영아학대, 잔인성과 같은 것들은 단순히 사회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으로 혐오대상이죠. 루즈 스스로도 그렇게 주장합니다. “영아들을 강간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받아들일수 있는 것이라 주장하는 사람은 2+2=5라고 주장하는 사람들 만큼이나 오류안에 있다.” 같은 입장에서 사랑, 자비, 평등, 희생과 같은것이 ‘실제로’ 선한것이라 말할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객관적인 도덕적 가치의 존재는 신의 존재를 나타내는데 쓰일 수 있습니다.

 

혹은 도덕적 의무의 본성에 대해 생각해봅시다. 어떤 행위를 옳거나 그르게 만드는 것이 무엇일까요? 누구 혹은 무엇이 우리에게 도덕적 의무를 부과할까요? 왜 우리는 어떤 행위를 해야만 하고 어떤 행위를 해서는 안될까요? 이 ‘~해야한다’는 것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전통적으로 우리의 도덕적 의무는 신의 도덕적 명령으로 부터 온다고 생각되어져 왔습니다. 하지만 신의 존재를 부정한다면 도덕적 의무나 옳고 그름을 이성적으로 이해하기 힘들어집니다. 리차드 테일러는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의무는 빚진 무언가 라고 할수 있다. 하지만 빚진 무언가는 오직 누군가에 대해서만 성립된다. 독립적인 의무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정치적 혹은 법적 의무는 명백히 그런면을 보여준다... 비슷하게 정치적 혹은 법적 의무를 넘어서는 도덕적 의무의 관념 또한 어떤 상위의 입법자를 가정한다. 다른말로 설명하자면, 도덕적 의무는 신에 의해 부과된 것으로 생각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왜 도덕적 의무가 정치적 의무보다 상위인지 설명할 수 있게 한다. 하지만 인간보다 상위의 입법자가 의무에 포함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도덕적 의무라는 관념이 여전히 합리적일 수 있는가? 도덕적 의무에 대한 관념은 신에 대한 관념없이 이해될 수 없다. 의무라는 단어는 남아 있겠지만 의미는 사라진다.

 

따라서 도덕적 의무와 옳고 그름이 신의 존재의 필요성을 요청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도덕적 의무를 갖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저는 한 캐나다의 대학 캠퍼스에서 발표를 했는데, 그곳에서 한 포스터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 포스터는 성폭행 정보센터에서 발행한 것이었는데, 거기엔 다음과 같이 써있었습니다. “성폭행: 아무도 아이, 여성, 혹은 남성을 추행할 권리는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중 대다수는 이 주장이 진실이라고 인식합니다. 하지만 무신론자는 어떻게 인간이 타인에 대해 성적으로 추행당하지 않을 권리를 가지고 있는지 설명할 수 없습니다. 도덕적 의무의 근원에 대한 가장 좋은 설명은 도덕적 옳고 그름이 거룩한, 사랑으로 넘치는 신의 의지 혹은 명령과 합치가 될때 그러한 의무의 근원이 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도덕적 책임의 문제를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는 여기서 신의 존재를 긍정하는 매우 강력한 실용적 논증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윌리엄 제임스 William James에 의하면 실용적 논증은 이론적 논증이 매우 급박하고 실용적인 중요성을 가지고 있는 질문에 대해 불충분할 때 사용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실용적 논증이 건전한 논리적 논증을 지지하는데 에도 사용 될 수 있음은 당연해 보입니다.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것과 따라서 도덕적 책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도덕적 책임이 허무하다는 결론에 이르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의 행위의 궁극적 중요성을 없애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허무함’은 도덕적 동기의 파괴를 의미합니다. 옳은 행위가 스스로의 이익을 희생하는 것을 의미하고 옳지 않은 것에 대한 욕망이 강할때 유혹을 이겨내는 것을 의미할 때 이 행위가 무의미하다는 신념은 개인의 도덕적 힘과 도덕적 삶을 약화시키기에 옳은 행위를 하는 것은 매우 힘들어집니다. 로버트 아담스 Robert Adams는 이렇게 말합니다. “누군가 어떤 행동을 하는 것이 우주의 전체적인 역사에 아무런 좋은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도덕적 삶의 유용성에 대한 비관을 만들어내는 것으로 보인다.” 이와는 반대로 개인의 행위와 선택이 궁극적으로 선에 기여할 수 있다는 믿음은 도덕적 삶을 강하게 만들어 줄 수 있습니다. 유신론은 따라서 도덕적으로 매우 실용적인 신념입니다. 무신론을 지지하는 이론적 논증이 부재하는 상황에서 이러한 신에 대한 믿음을 지지하는 실용적 근거는 신을 믿게할 충분한 근거가 되고, 신에 존재에 대한 두가지 논증을 받아들일 수 있게 하는 근거가 될 수도 있습니다.

 

 

요약하자면, 신학적인 메타윤리학적 기반은 도덕을 위해 필요한 것으로 보입니다.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객관적인 도덕적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 즉 우리는 도덕적 의무를 가지고 있지 않고 우리가 살고 행위하는 세계 안에서의 도덕적 책임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을 가능케 합니다. 도덕적인 가치가 부재한 세계가 만들어내는 공포는 자명합니다. 하지만 반대로 객관적인 도덕적 가치와 의무가 존재한다고 믿는다면, 신의 존재에 대한 믿음은 좋은 근거를 가지게 됩니다. 또한, 우리는 유신론을 받아들이게 하는 매우 강력한 실용적 근거 또한 가지고 있습니다. 도덕적 책임의 존재를 받아들이는 것이 만들어내는 효과를 고려할 때 그러한 근거를 받아 들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신 없이 진정으로 선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만약 어느면에서 선할 수 있다면, 필연적으로 신은 존재합니다.

 

---------------------------------------------

 

저는 이 글을 보고 그들이 왜 자유롭게 사고하지 못하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CLO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