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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재방송] 메멘토 감상문(스포 주의)

2010.09.15 13:11

지발돈쫌 조회 수:19965

개인의 아이덴티티에 대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외모(신체)로써 판단한다. 설사 초등학교 졸업후 20년 넘게 만나지 못했던 동창이라도 이름과 외모로 판단이 가능하다. 물론 어릴적의 나와 지금의 나는 전혀 다른 신체를 갖고 있다. 어쩌면 5살 때에 갖고 있던 "내" 몸안의 원자나 분자들은 40살이 넘은 지금 하나도 안 남아 있을 것이다. 외모, 그리고 DNA 같은 것들이 나와 다른 사람을 구별해주는 정체성일 것이다.

하지만 외모(신체)로 정체성을 판단하는 것은 문제가 많다. 예를 들어 컴퓨터를 업그레이드 하면서 한번에 한가지씩 교체하고 바꾼 것들은 따로 모아둔다고 하자. 나중에 모든 부품을 완전히 바꾸었다고 할 때 어느 시점부터 원래의 컴퓨터가 아닌 새로운 컴퓨터가 될까? CPU를 바꾸었을때? 마더보드? 하드디스크?

또 교체하고 나서 모아 두었던 부품들을 다시 조립하였을 때 어느 녀석이 "원래"의 컴퓨터일까? 원래의 부품들로 된 컴퓨터가 원래의 컴퓨터라고 말씀하시겠지만, 그럼 사람에게 적용하면 어떤가? 물론 사람의 몸을 구성하다가 배출된 원자/분자들을 모아서 원래의 사람을 구성하지는 못한다. 그렇다면 100% 복제된 인간은 어떻게 봐야 할까? 또는 장기를 하나하나 이식하고, 나중엔 뇌까지 이식한 뒤에 원래의 기억을 새로운 뇌에 이식하였다면?(이런 영화가 있었다. 기억, 심리, 버릇 모조리 복제가 된 것이다. 다만 차이점이 있는데, 복제인간은 아래 눈꺼풀을 뒤집어 보면 점으로 표시되어 있어 복제여부와 횟수를 알 수 있다)


종교인들은 영혼으로써 아이덴티티를 성립시키려 한다. 신체는 변하지만 영혼은 변하지도 멸하지도 않는다는 전제를 두고서 말이다.

하지만 영혼이 육체적 탄생 이전부터 존재한 것이라는 설(영혼선재설)을 받아들이려 한다면, 육체적 일생동안 있던 모든 일은 영혼과 별 상관없는 일이 될 것이므로 그러한 정체성은 의미가 없어진다. 반면에 탄생순간 영혼도 함께 발생한다고 하면, 이 영혼은 사후세계의 심판이나 윤회 이외에는 별달리 의미가 없다. 더구나 윤회의 경우 전생과 현생, 그리고 내생에서 영혼은 정체성과 관련해서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는다. 윤회론에서의 영혼은 전생의 기억이 없기 때문이다. 영혼이 기억을 계속 가진다는 전제를 가진 서구의 영혼론이 정체성의 문제에서만큼은 더 의미가 크다.


결국 심리, 정신 따위가 정체성의 주된 요소가 아니겠는가? 그 중에서도 특히 기억의 연속성(어제 이 홈피에 글을 올린 지발돈쫌과, 지금 글을 올리는 지발돈쫌은 나와 회원들의 기억에 의해 다른 사람과 구별된다는 뜻)은 나와 남을 구별해주는 중요한 요소가 아닐까? 내 몸이 비록 완전히 딴 물질로 바뀌어 있어도, 영혼이 존재한다고 해도 기억이 중요하지 않을까?

그런데 영화 [메멘토]는 정체성을 논할 때 가장 중요시하는 바로 기억에 대하여 태클을 건다.

단기기억상실증(전향성 기억상실증)에 걸린 주인공은 10분 이전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며 그래서 사람들에게 이용만 당한다. 악덕경찰이 마약범을 주인공의 아내를 강간살해한 것으로 유도하여, 결국 주인공이 마약범을 죽이게 만들고, 자신은 마약범의 마약과 돈을 갈취한다든지, 그 마약범의 애인이 복수를 위해 주인공을 이용하여 악덕경찰을 죽게 한다든지... 그런데 진실은, 아내 강간범은 이미 주인공이 죽여서 복수가 끝났다는 것이다(그는 아내가 강간당한 기억만 갖고 있고, 아내가 살해당한 기억은 없이 기록으로만 "존 G"를 살해범으로 지목하고 있다). 의기양양해 하는 주인공의 모습이 찍힌 사진이 바로 복수의 기념품(메멘토)이다. 그런데 그는 그 사진을 태워 버리고 계속 복수를 시도한다.

물론 레너드(주인공)의 정체성은 사고를 당하기 전(아내가 강간당하던 순간 강간범에게 밀려 머리를 다쳤던)까지의 기억들로도 충분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정체성에서 중요한 것은 기억과 함께 그 기억의 연속성도 중요한 것이다. 레너드에게는 그러한 연속성이 없다. 기억만으로 정체성을 정한다면 모텔에서 잠든 레너드와 나탈리(메뚜릭스에 나온 케리 앤 모스 언냐)와 대화하는 레너드와 아침에 일어나 이 닦는 레너드는 다른 사람이다. 기억을 갖고 있지 않으니 말이다.

기억과 메모보다는 해석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레너드는 자신이 이미 (예전의) 레너드가 아님을 실토하는 셈이다. 그는 아내를 자신이 죽였다는 것도 모르며, (자신이 상상하여 만든) 강간범에 대한 복수를 이미 실행완료했다는 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그가 심지어 자신의 단서들(문신, 사진, 메모)을 왜곡, 은폐(태우기) 하면서까지 자신의 존재의 이유를 만든다. 복수의 의무로써 존재의 이유를 만들기 위해 그는 자신의 정체성(기억의 대체물, 즉 사진)을 버리는 것이다.


영화작가의 의도는 현대심리학과 철학이 아이덴티티를 판단함에 있어 기억을 기준으로 삼아서는 안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영화는 여기까지다. 정체성이 무엇인지까지 영화는 말해주지 않는다. 단지 서구사회가 가졌던 관념인 "정체성의 조건/표상"으로서의 기억이 때로는 무의미할 수도 있다고 말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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