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딕트 수도원 예배당의 십자가를 보며(2002. 4.17)
2011.03.18 13:32
십자가에 달려있는(비하적 늬앙스임, 교수형 같은) 예수의 상은
어떤 교회나 성당에 가서 보더라도 그저 "아파 죽겠다"는 표정이다.
이런 극도의 메저키즘 정서가 드러나는 십자가 상에 대해
이런 극도의 메저키즘 정서가 드러나는 십자가 상에 대해
"자기들 나름대로" 사랑의 정신으로 충만한 기독교인들은 우리에게 말한다.
"신은 당신을 너무나 사랑하시기에, 당신의 구원을 위해, 당신 대신 고통받고 계십니다"
그럼 기독교인들에게 깨놓고 한번 물어보자.
"도대체 예수의 고통이 인간의 고통이나 고난과 다른 점은 무엇인가?
신이 우리에게 내린 고통(혹은 우리가 고통을 받는 것을 묵인하거나 방치한)을
(상징적으로나마) 걷어 가겠다는 대속의 의미인가?"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아마도 "그렇다"고 대답할 것이다.
예수십자가상에서 보여지는 예수의 표정은 인간들의 고통속 표정과 다를 바 없다.
즉, 이 고통의 정서는 인간으로 하여금 연민과 함께 공감을 쉽게 끌어내는 작용을 한다.
그러나, 그 고통의 동기에 대해서 예수와 보통 인간은 다르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리하여 기독교인들은 고통받는 예수에게서 깊이 감동받음으로써
이 세상의 모든 고통과 고난의 원인에 대해 신을 면책시키고 신의 은혜를 느끼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이 간과하는 것이 있다.
그토록 속죄양 예수에 대한 무한한 감동으로써 고통과 고난에서 해방되었다고 느끼고 있지만,
그들에게는 여전히 고단한 현실이 남아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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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기독교인들에게는 주일성수가 아니라 일일성수가 필요한 셈이다.
그러나 목사나 신부들이 좋아하지는 않을 것 같다.
그러나 목사나 신부들이 좋아하지는 않을 것 같다.
그들도 딴짓할 시간이 필요하니 말이다.
그리하여 이들은 신자들에게 고단한 현실을 사후의 피안으로 대체하는 논리를 함께 펴는 것을 잊지 않는 것 같다.
그리고 중보기도를 해줄테니 주일에 와서 부탁하라고 한다.
내가 여기까지 말했을 때 함께 수도원을 방문했던 신부는
이러한 결론이 심각한 억측이라고 했다.
그렇다. 억측 맞다.
그런데 결과에 있어서 무슨 차이가 있는가?
현실을 극복하려는 극기적 용기 대신 고통에 순응하고 부조리에 눈감게 만드는 건 변함이 없는데 말이다.
그래서 이렇게 말했다.
"어쨋든 사람들을 순종케 하는 것은 사실이잖습니까?"